[장석춘의 노사이야기(5)] '노사민정 사회협약'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을!
[장석춘의 노사이야기(5)] '노사민정 사회협약'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을!
  • 김시온
  • 승인 2015.12.29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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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의 신예로 부상하다.

구미을

▲ 구미을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한 장석춘 전 한국노총 위원장

'노사민정 사회협약'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을! 


LG전자노조 위원장실에서 보는 세계는 내가 속한 기업 LG전자였다. LG전자의 혁신, 그리고 LG에 몸담고 있는 조합원들의 소망과 자부심만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소망을 받들고 그들의 자부심을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매일 생각했다.


그 LG를 떠난 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금속연맹 위원장으로서 보고 겪는 세계는 또 달랐다. 조합원 30~40여 명의 노동조합에서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분투하는 간부들의 노력은 가슴 뭉클한 것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으로서 보고 겪는 세계는 더 넓었다. 그곳에서 노조라는 울타리 밖, 참혹한 처지에 내몰린 미조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사회취약계층, 빈곤층을 알리는 숫자가 나를 붙잡았다. 그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노조가 우리 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새겼고, 그 분들에게 의미 있는 노총 조직이 될 수 있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살폈다.


세상은 넓고 고뇌는 많았다.


그렇게 내 눈을 틔워가면서 나는 LG전자에서 있었던 노경협력이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웠다. 기업인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노/사/민/정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나눔과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약속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것이 대한민국의 희망을 여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노동계의 신예로 부상하다.


2006년 5월 LG전자노조 위원장으로서 세 번째 임기 중에, 한국노총 내 최대 산업별 연합단체인 금속연맹에서 위원장 선출이 있었다. 그 선거에서 내가 갑자기 급부상해서 후보로 추천되었다.


선거를 앞두고 LG전자 내 노조활동에 주력하던 내게 연맹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금속연맹의 여러 지역조직 대표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연맹의 주요 활동에서 LG전자노조가 모범적으로 참여했고, 내가 조직을 추스르고 통합시키기에 적임자라는 의견들이 적지 않았다.


고심 끝에 수락했다. 다만 2007년 말까지인 LG전자노조 위원장 직무를 병행하는 것을 용인해달라고 요청했다. LG전자노조 조합원들과의 약속은 그것대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노총의 경험 많은 연맹 위원장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신예였다. 가끔 LG전자노조 활동을 통해서 언론에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단위 사업장 노조활동에 관한 것이었고, 한국노총 중앙 활동무대에는 드러나지 않은 신예였다. 이 때문에 내가 금속연맹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한국노총 내 다른 조직 간부들 사이에서 '장석춘이 누구냐'며 이름이 오르내리고 뒤늦게 LG전자노조의 노·경 협력 사업이나 노조활동이 다른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서 관심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듬해 여름까지는 여전히 LG전자노조 활동을 중심으로 일했다. 당시 연맹 활동은 사무처장이었던 후배 손종흥 님이 수고해 주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이후 LG전자노조 위원장 임기가 6개월여 남았을 즈음부터는 나도 한국노총 사무실 건물 9층에 있는 금속연맹 위원장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본격적으로 금속연맹 위원장 활동에 주력했다.


나는 연맹 간부들에게, 그리고 연맹의 주요 지역본부, 사업장 노조 대표자들에게 거듭 '약속을 지키는 노조 활동'을 강조했다. "말로 허장성세하고, 약속을 가벼이 여기고, 집행되지 않을 사업을 결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노동조합 활동의 혁신을 독려했다. 당시 금속연맹에는 오랜 노조활동 경험이 있는 선배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분들이 나의 이런 혁신 방침을 누구보다 적극 호응해 주었다. 그리고 변화가 있었다.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간부들 사이에서 ‘금속연맹 위원장이 하기로 한 건 반드시 집행된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런 만큼 우리 연맹의 위상이 높아져 갔다.


단위 사업장 노조 위원장이 중앙 무대에 신예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 한국노총 조직 분열 양상


2007년 하반기 한국노총이 어지러웠다.


가장 쟁점이었던 건 그 해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취할 한국노총의 정치방침을 둘러싼 사업과 지지 후보, 정책연대 정당 결정 건이었다. 대선에 나선 후보, 정당에 대해 한국노총 전체 조합원에게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묻고 여기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 정당과 정책연대 협상을 추진한다는 구상이었다.


나는 애초 이용득 위원장 집행부가 이끄는 정책연대 방침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무리하게 경직적인 정치방침을 결정해서 조직 통제력을 잃고 조직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진행했던 것과 같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사업 추진 자체를 반대했다. '정당들 사이에서 중립에 서자'는 게 나의 주장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노총 소속 산별연맹의 위원장으로서 정책연대 대상을 정하는 조합원 투표 등을 진행하면서 조합원의 뜻을 확인하는 공정한 관리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결정된 한국노총의 방침을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조합원들이 어떤 강박이나 선입견 없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임을 거듭 강조했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이 특정 정당 편향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했고, 연맹 간부들에게도 ‘어느 정당이든 편들지 마라’며 못을 박았다.


이런 내 활동은 민주당을 옹호하는 간부들에게는 보수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간부들에게는 개혁적으로 비추어져서 본의 아니게 '중도파'로 불리어졌지만, 나는 이런 원칙을 거두지 않았다.


그해 12월, 정권이 바뀌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국노총은 그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속한 정당 한나라당과 정책협약이라는 걸 맺어서 조직적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한국노총 위원장 재선을 꿈꾸던 이용득 위원장에 대해 한국노총 내 적지 않은 산별연맹 대표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했다. 정책협약을 추진하면서 조직을 무리하게 끌어온 것이 불협화음의 요인이 되었던 듯하다. 일부 조직 대표들은 ‘민주당에 경도된’ 이용득 위원장의 정치성향을 문제 삼기도 했다.


그렇게 논란이 거듭되는 중에 많은 산별연맹 대표자들 사이에서 당시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재선의 뜻을 보였던 이용득 위원장에 맞설 대안으로 내가 꼽힌 것이다. 1년 여 금속연맹 위원장 활동에 대한 신뢰도 이런 추천의 동력이 되었다. "한국노총을 통합적으로 이끌 지도자는 당신밖에 없다"는 요청도 거듭되었다.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말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한 장 위원장이 대선 직후 노총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에 휘둘릴 수 있다"는 의견, "차기 위원장이 반드시 맡게 될 '노사관계 로드맵 입법' 문제는 사실상 답이 없는데, 이 사안이 모두 종료된 후에 맡는 게 나을 것이다"는 의견, 그리고 "금속연맹 위원장 1년차인데, 더 경험을 쌓고 나서는 게 좋겠다"는 의견 등이 지금 기억된다. 돌아보면 이런 의견들이 모두 100% 맞는 얘기였다.


고심 끝에 내가 나섰다.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 출마를 결심한 것이다. 출마 결심을 밝히자 나를 지지하는 조직들이 속속 입장을 표명하면서 선거 판세가 확연히 내 쪽으로 기우는 양상이었다. 특히 한국노총의 정책연대 조합원 총투표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의 연대로 결정되면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진영이 힘을 받았고, 그들이 당시 이용득 위원장보다는 나를 대안으로 미는 형국이 되었다.


• 한국노총 위원장으로 조직통합 책무 맡아


조직세가 출마를 선언한 내 쪽으로 기우는 상황에서 이용득 위원장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용득 위원장을 만났다.


이 위원장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조직 통합'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지금 한국노총이 편을 갈라 다투면 우스운 꼴만 당할 것 같다. 누가 나오든 내가 당선되기야 하겠지만 모양이 좋은 것은 아니다. 이 위원장의 지지를 받아 통합적인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노총의 통합을 위해서 당신과 함께 지금껏 한국노총을 이끌었던 당신네 임원들을 중용하겠다."


그 날 이 위원장이 이런 내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지만 그 뒤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는 결과적으로 내 제안대로 되었다. 이용득 위원장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후보등록을 포기했고, 나는 단독후보가 되었다.


2008년 1월 말 내가 노총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것도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선거인단 방식의 선거에서 92%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돌아보면 불출마를 결심한 이용득 위원장의 결단이 조직의 통합력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고, 나는 비교적 원만히 조직을 이끄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된 셈이기도 했다. 반대세력이 없는 지지였고, 조직통합에 대한 절실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 열망을 책임져야 할 자리에 선 것이다.


큰 규모의 노조라고 하지만, 그래도 일개 단위사업장 노조인 LG전자노조의 현 위원장이 임기 막바지에 전국조직인 한국노총 위원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 셈이다. 한국노총의 역대 임원들, 동료-선배들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계의 신예가 'LG 노경관계'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이슈메이커가 되고 이를 토대로 한국노총을 이끌 위원장에 당선된 것이다. 파격이었다. 나는 이 파격이 혁신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노동계 밖의 참혹한 현실 살펴야


당선 다음날, 전태일 열사의 묘소가 있는 마석모란공원을 참배하는 것으로 한국노총 위원장 직무를 시작했다. 가끔씩 들르기도 했던 방이지만, 위원장실에 들어서면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은 '신예', '보수파로부터 확고히 지지받는 노동계 개혁 주자' 등의 문구로 내가 노총 위원장에 당선된 것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웠다.


직면한 문제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전임 집행부가 내게 건넨 사안은 녹녹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가장 주목받은 건 한나라당과 맺은 정책협약의 미래가 어떠할 지였다. 한국노총은 이명박 정권의 출범을 실질적으로 도왔고,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한나라당과 정책협약을 맺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 정책협약을 어떻게 끌고 갈지를 결정하는 건 내가 이끌 한국노총의 몫이기도 했다. 당시 어쩌면 모두의 관심거리가 그것이기도 했다. 정책협약은 약속인데 그걸 합당한 이유 없이 없앨 수도 없는 것이고, 그 정책협약의 성과가 작을 때 조합원들은 집행부를 탓할 게 명백했다. 더구나 당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국정을 펼칠지 낙관할 수만도 없었다. 정권에 대한 민심의 지지도는 곧바로 그 정권과 밀월관계를 형성한 한국노총에 대한 조합원과 국민의 평가로 직결될 것이었다. 실제로 ‘광우병 파동’으로 말해지는 집권 초기 시민들의 대규모 촛불시위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시민들을 정권비판 세력으로 결집시켰고, 이렇게 모여진 시민들은 정권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한국노총에 대해서도 냉소적 태도를 보였다.


또 하나 큰 문제는 '노사관계 로드맵'이라고 일컬어지는 노동조합법 개정 건 처리문제였다. 전임 이용득 위원장은 2007년 1월에 시행되기로 한 '노동조합법'의 일부 조항(복수노조 허용,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의 시행을 3년 뒤로 유예하고, '3년 뒤에는 유보 없이 시행 한다'는 내용으로 정치적 합의까지 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 조항은 노동조합으로서는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내용들이었다. 이 법 조항의 시행이 내가 맡은 위원장 임기 내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난제를 앞에 두고 있어서, 나를 아끼던 일부 동료들이 한국노총 위원장 출마에 극렬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피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누군가 마셔야 할 독배라면 내가 마셔버리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맞닥뜨린 문제는 LG전자 노조위원장이 생각하던 문제와 전혀 딴판이었다.


우선 한국노총의 수많은 중소기업 노동조합들의 형편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중소기업의 기업인들이 여러 경영의 난제들을 감당하면서 기업을 이끌고 있었다. 그런 기업에서 노동조합이 주장할 정당한 권리, 적정한 근로조건의 요구는 항상 기업의 지불능력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찾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가들이 그런 것처럼, 그 기업인이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노동조합을 배척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기업의 노동조합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조합원의 권익을 지키는 것인지 내가 겪은 노조활동만 가지고 당당하게 대안을 제시하고 이끌 수 없었다. 때로는 속수무책으로 기업인의 부당노동행위와 노조 생존의 절박한 과제를 견디며 활동하는 소속 사업장 노조 간부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노동조합 밖의 세상이었다. 노동조합 밖에는 전체 노동자의 90%가 미조직 상태로 일하고 있다. 그 분들 중에는 노조를 주장하는 게 '배부른 요구'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의 노동자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노조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는 취약계층은 노동계 내부보다 더 참혹했다. 한국노총의 정책을 담당하던 후배들은 매번 취약계층의 다양한 통계를 갖고 와서 "이것도 보셔야 한다"며 나를 채근했다. 연 소득이 대기업 노동자의 한두 달 급여 정도에 불과할 임금으로 일하는 취약근로계층, 영세자영업자들,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들 통계였다.


자료를 보고 있으면 머리에 쥐가 날 형편이었다.


• 일자리를 위한 타협, '책임을 나누자'


위원장 임기 초반은 한나라당과 맺은 정책협약의 틀 내에서 활동이 이루어졌다. 정부가 특별히 노동조합을 존중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노동조합의 의견을 묻고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노총 위원장이 맡는 여러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직책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본 위원, 노사발전재단 공동 이사장, FTA국내대책위원회 위원, 민화협 상임의장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세상에 돌보아야 할 계층이 많고, 살펴야 할 사안이 널려있다는 걸 하루하루 깨달아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요구만 살피면 경영위기에 봉착한 중소영세기업을 이끄는 기업인들을 돌볼 수 없게 되고, 어려운 이웃을 돕자고 요구하려면 그 재원대책을 함께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다 돌볼 수 없는 문제들로 넘쳐났고, 올바른 정책대안을 찾는 건 답 없는 문제를 풀어가는 미로 같았다.


취임 초기 나는 LG노경관계를 이끈 경험을 토대로 “노동계는 공공부문과 대기업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재계와 정부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원하청 문제 해결에 주력하자”고 제안하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내세우기에 주력했다. 이런 제안에 언론은 우호적이었다. 차라리 노동계에서 “이해는 하겠는데, 너무 일찍 패를 던지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나는 같은 제안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우리 경제 밖에서 재난이 밀어닥쳤다. 2008년 여름 이후 몰아닥친 미국 발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세계적 불황사태가 우리 경제를 휘청거리게 한 것이다. 주가가 폭락했고 환율폭등으로 악몽과 같던 IMF 위기 상황을 떠올려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은 노동조합의 활동공간을 좁히고 노조의 발언권을 제약하는 한편, 무엇보다 우리 사회 취약계층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고통을 강제했다. 당장 일자리를 구하는 노동자들은 취업할 수 없었고, 장애인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취약계층은 사회적 지원이 줄고 국가의 복지혜택이 축소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언론을 통해서 어려운 계층의 비명소리가 전해졌지만, 우리 사회는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008년 하반기 내내 모든 회의에 갈 때마다 내 마음속 의문은 이것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노동운동은 뭘까? LG전자에서 경험한 노사관계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나?


이런 고민 끝에 내가 생각한 것이 노/사/민/정 대화였다.


경제위기 상황이 본격화하던 2008년 말 나는 경총 이수영 위원장 등 노사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당시 국제금융위기의 한복판에 있던 아일랜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아일랜드 노총 위원장으로부터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단체의 공동 노력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위기 상황에서는 함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노사는 파도를 헤치고 가는 배에 같이 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노사가 대화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 인식과 그간 노사가 대화해온 경험을 토대로 미국발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선 아일랜드의 문제에 대응한다는 얘기였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이었고 내가 노조의 혁신을 말하며 촉구해온 문제인식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건 아일랜드가 단일 노총 체제여서 이런 문제인식에 대한 비판세력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양 노총이 서로 눈치보고 심지어 헐뜯으면서 서로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 대화와 타협의 경험이 적다는 것, 그래서 앞장서는 측이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할 용기와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이 다르다고 느꼈다. ‘한국의 실정에 맞는 대타협 노력이 필요하다’, 이게 아일랜드에서 내가 새긴 각오였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점점 더 내 구상이 구체화해 갔다. ‘내가 나서자’, ‘비난은 감수하자’, ‘남들이 앞서서 하는 것을 우리가 하지 못할 게 없다’, 그리고 ‘대화에 참여하는 진영의 폭을 넓게 해서 대화 역량의 부족을 뛰어 넘는다’.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 속에서 차례대로 정리되어 갔다.


그리고 결단했다. 일단 믿음을 갖고 만나야 한다. 만나면 작은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잡아야 한다. ‘우리 손을 잡자!’


2009년 1월 신년 벽두에 내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해 나섰다. 먼저 이런 뜻을 당시 경총 회장이었던 이수영 회장에게 전했다. "회장님, 저와 회장님이 앞장서면 다들 박수칠 것 같습니다." 오랜 동안 노사대화를 책임져 왔던 이수영 회장은 흔쾌히 받았다. "장 위원장이 하자는 걸 마다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1월 말 프레스센터에서 함께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다. "2월까지 정부를 포함해서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대타협 합의를 이끌어내겠다.". 회견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뜨거웠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대타협이 시작되었다’며, ‘일자리 나누기에 앞장서는 노동계 대표’라고 나를 추켜 주었다. 정부 역시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화의 폭을 넓게 하자는 생각으로 YMCA와 기독교, 천주교, 조계종 등 종교계 지도자 등을 연이어 만났다. 다들 흔쾌히 맞아 주었다. 그리고 변협 이세중 회장을 따로 만나 대화의 좌장을 맡아주실 것을 부탁했다. “나서주십시오!”


•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


곧바로 회의체가 꾸려졌다. 그리고 일자리 확대 대책을 마련하고, 경제위기 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는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노/사/민/정의 대화, 실무협의가 거듭되었다. 참여정부 때인 2004년 초 이미 한 차례 ‘일자리대책 노사정 합의’ 경험이 있어서 의제선정과 논의를 풀어가는 사례로 삼을 수 있었다. 물론, 쟁점은 매 회의 때마다 거듭되었다. 사안마다 노/사의 의견이 달랐고, 정부는 정책집행자로서 걱정거리를 늘어놓았다. 예를 들면,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보장을 개선하자며 ‘공공의료체계 강화’를 합의해놓고도, 노동계는 30%를 명문화하자고 하고, 정부는 숫자를 넣는데 반대하고, 그러면 경영계는 다시 검토해보자고 되돌아가는 식이었다.


이런 고비들을 넘기며, 때로는 밤을 새우며 논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2월 말, ‘고통분담을 통한 일자리 유지 및 일자리 나누기’,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 ‘정부 지원 대책’ 등의 의제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첫 회의를 시작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대기업 노동자들 임금 인상 자제 및 임금동결'을 제시하면서 "기업인들과 정부는 무엇을 하시겠느냐"고 물었다. 다들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노동계에서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맨 먼저 내놓는 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회의를 준비하면서 노총의 실무진들은 “임금동결 얘기가 나올텐데 최대한 버티면서 논의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나는 견해가 달랐다. “지금 임금동결은 중소기업 얘기가 아니고 대기업 얘기 아니냐. 그걸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어느 국민이 우리를 진정이 있다고 보겠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카드면 먼저 내놓는 게 옳다.”고 나는 주장했다. 나로서는 새로운 얘기가 아니라 1년 전 노총 위원장 선거에 나서면서부터 거듭 제안하고 독려해왔던 얘기이기도 했다. 나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LG전자의 내 동료들이 반드시 응원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회의가 시작되자 곧바로 평소 생각대로 ‘우리가 분담하기로 한 몫, 책임을 내놓는 것부터’ 말하고, 재계나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고통분담을 위한 협의가 비교적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2월 말, “위기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졌다”는 낭보를 국민들에게 내놓을 수 있었다.


당시의 합의는 많은 부분을 담고 있지만, 합의가 충실히 이행되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노/사/정 간의 갈등요인이 곧바로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위기상황에서 일자리를 지키고, 취약계층을 돕는 정부예산을 대폭 확대하는 계기가 되는 사회적 타협으로 기능했다는 건 틀림없는 성과일 것이다. 나는 그 뒤 “장 위원장님 눈이 무서워 고용조정 못하겠습디다, 회사 간부들에게 합의 문구를 보라고 저희가 독려합니다.”는 기업인들의 인사를 적지 않게 들었다. 그 해 위기상황에서 다른 어느 해보다 크게, 긴급하게 취약계층 지원예산 중심의 추경 예산을 편성하게 한 힘도 2.23 대타협이었다.


당시의 합의는 적어도 노/사/정이 자기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을 나누고 더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주역이 되겠다는 약속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정부나 시민사회 주역들도 손을 맞잡은 노사를 돕고, 함께 위기극복에 혼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합의는 자주, 더 열정적으로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어려울 때마다 살펴보고, 앞의 합의사항 이행실적을 꼼꼼히 점검하고, 합의를 보다 구체화하고, 새로운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신발 끈을 조이는 노/사/민/정의 동반노력이 거듭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럴 때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약속하고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여전히 계층 간 갈등, 비정규직 문제, 취약계층의 현실, 그리고 청년층 노년층을 포함한 전 계층적인 일자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만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현실이니 어쩌면 현대국가의 늪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주, 4년 전 그 합의문을 다시 열어보곤 한다. 여전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절실한 과제들이 그 합의문에 담겨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곱씹어 읽을 때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고 다짐하곤 한다.


장석춘 전 한국노총 위원장 약력 


2012년 금탑산업훈장
2002년 은탑산업훈장
1996년 국무총리상

2008.02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2006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련위원장

2015. 12 구미을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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