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미 칼럼] 몸에 깊숙이 박힌 '못'을 어떻게 빼내요?
[황정미 칼럼] 몸에 깊숙이 박힌 '못'을 어떻게 빼내요?
  • 황정미 인재기자
  • 승인 2021.06.07 1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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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깊숙이 박힌 못을 어떻게 빼내요? 저는 예수의 몸을 생각했어요. 예수의 몸속으로는 더 크고 더 깊은 못들이 들어갔어요. 예수는 그 못 들을 말끔히 빼내었지요. 용서를 통해. 하지만 저는 예수가 아니잖아요. 살 속에 박혀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못을 빼낸다는 것은 못의 고통을 되살리는 행위예요. 저에겐 그랬어요. 저는 기도를 할 수 없었어요. 기도에 대한 생각만 했어요. 그럴 때마다 영서가 떠올랐어요." [길, 저쪽] 정찬 소설 중에서

칼에 찔렸을 때 갑자기 칼을 빼면 출혈로 죽는다고 한다. 칼은 나를 죽이려 했지만 몸에 들어오면 나의 일부가 되어 피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비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경험한다. 몸에 들락거리는 다양한 감정 요소가 처음에는 이물감처럼 불편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러나 부드러운 자극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자극이라면 '이물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못'을 박는 주체가 '그'일까? '나'일까?

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는 말로 치부하기에 우리는 너무 많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금세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이물감이든 깊숙이 박혀서 빼기 어려운 못이든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이기는 못은 없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서 정희진 작가는 말한다.

눈물이 범람하는 강가에서도 사랑은 한결같지만, '못'은 산화한다고.


우리가 느끼는 상처는 자주 왜곡되고 오염되기도 하나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너는 아프니? 나는 이미 잊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깊숙이 들어 있는 '못'을 빼냈다는 걸까?

필자를 찾아오는 내담자가 늘고 있다.

상담실의 모양을 갖추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가슴 깊숙이 박힌 못을 빼고 싶다고 온다.

들어주고 들어주고 들어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진 상처를 똑같이 느낀다고 가슴 아파해도 결국 '못'을 뺄지 몸의 일부로 여기고 살지는 그들의 몫이다.

사라지지 않는 상처(못)를 빼서 용서할지 그 상처(못)를 품어주고 살아갈지는 그들의 몫이다.

그래도, 몸에 깊숙이 들어있는 '못'을 빼내고 싶다고 말한다면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상처(못)를 빼내지 못한 비겁자라고 고백할 것이다.

우주에서 보면 인간은 하루를 사는 곤충이나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다름없다고 한다.

이름을 얻으려고 발광하다가 타인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드물지만 흔적을 지워가며 사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처럼 무언가 흘리고 다니는 서툰 사람이지만 그래도 노력한다.

명예와 권위보다 '사랑'을 택하고 더 큰 '못'이 박혀있는 사람을 안아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대는 마음 깊숙이 박혀있는 '못'을 빼내고 싶은가? 아니면, 몸의 일부로 안고 살아갈 것인가?

산화되어버릴 못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버리지 못해 강가에서 울고 있을 것인가?

필자는 믿는다.

결국 '사랑'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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