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춘의 노사이야기(4)], 'LG 노경 파트너십'을 이끌다.
[장석춘의 노사이야기(4)], 'LG 노경 파트너십'을 이끌다.
  • 김시온
  • 승인 2015.12.20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혹 내 삶에 영광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LG가 이루어준 것이다.

전

▲ 전 한국노총 위원장 장석춘(구미을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

나는 'LG맨'이다. LG에 청춘을 묻었고, 그 곳에서 삶과 세계를 보았다. LG는 어쩌면 내 삶의 모든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혹자는 경영인도 아니면서 좀 지나친 얘기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내 주관으로는 내 수고가 경영진이 쏟은 헌신과 열정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LG로부터 얻은 것도 많다. 혹 내 삶에 영광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두 LG가 이루어준 것이다. 내가 사회적으로 도전할 때 LG전자에서 겪은 삶의 굽이굽이가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내가 벽에 부딪혔다고 느낄 때 LG에서 내가 겪은 일, 사업장에서 뜻을 나누고 정을 주고받은 친구, 동료들을 생각했다.


그 사업장의 여러 벗들, 훌륭했던 기업인들을 기억한다.


그들과 나눈 꿈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 내 삶의 경험이 오늘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구미공장 구석구석을 누빈 9년 지부장


91년 말 구미2지부 지부장 선거에 출마해서 1,500여 명의 조합원을 대표하는 지부장을 맡으면서 나는 작업장 현장을 떠났다. 대신 그 후 20여 년 동안 노동조합 사무실, 노동단체, 사회단체, 정부기관 사무실이 내 작업장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현장에서 일하던 열심과 책임감으로 내 일을 해왔던가 돌아보게 된다. 혹 '당신도 그저 그런 노조간부였다'고 힐난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평가가 있다면 그건 내 몫이고 내가 책임질 일이다. 다만, 나는 내가 옮긴 사무실이 청춘의 날들에 일하던 작업장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일했노라 말하고 싶다.


지부장이 된 나는 이전 노조에 없던 새로운 활동들을 만들어 갔다. 어쩌면 모든 것을 새로이 배우며 새로운 노조 상을 세워가는 활동이었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당시 금성사노조를 이끌었던 선배, 동료들의 제안을 따르고 챙겼다. 그리고 다른 사업장 노조의 사례 등을 열심히 연구했고 좋은 것은 따라 배우려 애썼다. 아침 출근 조합원에게 인사하기, 노조가 앞장서는 제품 품질 개선활동, 1등 회사 만들기 운동 등이 그런 것들이다.


나는 '노조는 회사와 싸워야 한다'는 당시 노조활동을 하는 이들의 통념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망하면 노동자도 망한다, 이 기본적인 인식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노조는 회사가 잘되도록 이끄는 주역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회사가 잘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 그런 활동을 찾아서 조합원들에게 설명하고 함께 해나갔다.


당시 구미2지부가 만든 노조 활동보고서에는 지부장 재임 1년 차 연말에 내가 대의원들에게 드린 감사의 글이 이렇게 적혀있다.


"작금의 혼미한 여건에 이제 노사는 과거의 자기주의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운명체임을 재인식하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 나아가서는 후손들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기업주와 근로자의 관계는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정립되어 서로 공존공영의 동반자로서 의미를 확고히 다져 모든 어려움을 신뢰로서 극복하여 최고의 생산성과 최고의 근로조건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관심을 가지고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우리들의 권익신장과 복지증진 향상, 산업평화 정착에 적극적인 동참과 협조를 해주신 조합원 및 대의원 동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건강과 댁내 행운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곱씹어 읽으면 서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글이지만, 새로운 노조활동에 대한 나름의 문제인식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 동료들, 조합원들을 생각하니 다시 또 고맙고 감사하다.


그 시절 구미지부장으로서 했던 활동 중 가장 기억나는 게 시민들에게 전자제품 수리 자원봉사 활동을 3~4년 동안 줄기차게 한 것이었다. 우선 구미 시내에서부터 시작했다. 매주말 노조 간부들이 인솔해서 조합원 중 전자제품 수리에 역량이 있는 조합원들과 조를 짜서 시내에 나가 전자제품 무료수리활동을 시작했다. 전자제품 수리를 위한 비품은 회사가 제공했고 노조는 사람과 시간을 내놓은 셈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회사 제품만 하려 했는데, 해보니 그게 부적절한 것을 알게 되었다. 소비자는 특정 회사 제품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금성사나 삼성이나 대우전자나 그냥 똑같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전자회사였다. 그래서 우리도 어느 회사 제품을 따지지 않고 다 수리해드렸다.


TV제품을 보는 데에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내 자신부터 팔을 걷어붙이니 다른 간부들도 뒷짐만 지고 지켜볼 수 없었다. 다들 한 팀이 되어 수리활동을 벌였고 시민들의 칭찬이 거듭되면서 활력도 붙었다.


회사에서 가까운 구미시내로부터 시작된 전자제품 수리 활동은 해를 넘기며 경북의 군, 면 단위까지 이어졌고, 나중에는 대전, 충북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시민들의 박수는 우리를 고무시켰다. 애물단지처럼 속 썩이던 전자제품을 고친 소비자가 우리를 칭찬했고, 그런 반응을 접한 회사가 고마워했다. 수리활동에 나선 조합원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재능이 그렇게 쓰이는 것 때문에 그런 주민활동을 제안하고 이끈 노조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쩌면 회사에서 이런 봉사활동을 조직했으면 쏟아졌을 불만도 노조가 했기 때문에 없기도 했던 것 같다. 두루 평가가 좋아서 이 일을 주도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경영진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노경자율경영지원팀을 꾸려서 생산공정 개선 활동을 살피고 노동자들의 문제인식을 모아 회사의 혁신 방안으로 제안하는 등 생산성 향상을 위한 활동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무엇보다 현장 조합원들 속에 머물면서 조합원과 함께 하는 노조간부 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구미공장 구석구석을 누볐고 조합원들의 동생으로, 동료로, 형으로, 오빠로 역할 하는 지부장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 혁신이 사는 길


95년 금성사는 이름을 LG로 바꾸었다. 국내 브랜드에 머물던 과거를 벗고, 새로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변화였다. 90년대 초까지 이어졌던 경영위기를 넘어 도약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회사는 이미 해외시장 판매 점유율이 국내시장 판매치를 넘어설 정도로 국외 시장을 개척하고 다른 외국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해 가고 있었다.


그 기간 구미공장에서 노조 지부장 9년을 치룬 나는 IMF 위기의 여진이 여전하던 99년 초 LG전자노조 위원장에 나섰다. 그리고 그 후 9년 동안 LG전자 노조위원장으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면서 내 마음 속 가장 큰 바람은 한마디로 '변화'였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가, 과거와 다른, 통념과 다른 노조활동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런데 같은 기간 회사의 고민 역시 변화, 혁신이었다.


LG는 멈출 수 없는 조직이었다. 세계시장은 끝없이 넓어졌고, 시장 확대의 최일선에서 국제 사회에서 다른 기업들과 쉼 없는 경쟁을 거듭해야 했다. 어쩌면 글로벌기업으로서 존재의 근원 자체가 세계시장에서 격한 경쟁에 자신을 내놓는 것이고, 그 경쟁을 견디며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기업이었다. 혁신을 멈추면 시장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러면 기업의 내부구성원이 생활 터전을 잃을 것이고, 그보다 먼저 수많은 연관기업과 그들 기업의 가족들이 생활의 위기에 떠밀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관기업, 내부구성원의 생존을 위해서 기업은 혁신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기업의 노조위원장으로서 내가 고민해야 할 것 역시 변화였고, 혁신이었다.


혹자는 당시 내가 이끈 노조활동에 대해 ‘어용’이니 ‘협조주의’니 하며 쉽게 규정하려 든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LG같은 사업장에서 왜 회사 측과 단호히 싸우지 않았던가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며 싸워야 했다는 것이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거듭 스스로 다짐하고 조합원들에게 약속했었다. “강한 노동조합을 세우겠다.” 그런데, ‘강한 노조’는 분규를 많이 크게 하는 게 강한 노조가 아니라, 알차게 교섭하고, 경영진으로부터 존중받고, 조합원을 실질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노조라고 나는 생각했다. 강한 노조와 약한 노조를 구분 짓는 것은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고용여건을 안정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노조인지 아닌지로 판가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강한 노조'가 되기 위해서 노동조합 활동의 혁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우선 회사를 존중하고 경영진을 도우면서 노동조합이 실질적인 경영진의 동반자임을 인정받는 것, 회사에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걸 협력적 노사관계라고 평하는 걸 탓할 건 아니지만, 그건 누구로부터 강요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조합원들, 내 자신의 선택이었다.


내가 생각한 강한 노조는 목소리 높여 요구하는 노조가 아니라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는 노조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경영에서부터 조합원의 복지까지 책임을 지고 책임을 나누는 노조가 진짜로 강한노조인 것이다. 나는 노조 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경영진에게 요구하는 만큼, 노조가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를 함께 일하는 간부들에게 묻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또 나는 강한 노조로 이끌기 위해서 투명한 운영, 도덕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다. 노조나 노조간부의 부당한 특권을 용인하지 않았고, 조합원이 일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일한다는 각오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에 투명한 경영을 요구하는 만큼 노조 역시 투명해야 했다.


• 사회적 책임 다하는 노조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 운영’을 또 하나의 모토로 삼았다. 사회의 어두운 곳을 살피고 조합원들의 뜻을 모아 작은 도움이라도 내놓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99년 노조 최고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산을 책정했고 이 예산으로 노조가 주축이 된 다양한 봉사활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편, 노경협의회에서 노조의 제안으로 조합원들의 급여 중 1,000원 이하의 금액을 모은 우수리 기금의 사회공헌사업을 제안해서 성사시키기도 했다. 노조의 예산으로 하는 봉사활동이 수천 만 원 정도의 사업이라면, 회사와 함께 하는 사회공헌사업은 매년 수억 원 규모의 사업이었다. 이 예산으로 독거노인, 복지시설, 재난에 처한 분들에 대한 지원 등을 거르지 않았고, 특별히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 사업 역시 매년 빠트리지 않았다. 매년 그 지원규모와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봉사활동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노동자와 경영진이 함께 하는 사회봉사활동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어려운 지구촌 가족을 돌보는 일로 사업의 대상도 넓혀나갔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 등의 재난을 당한 이들,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해 찾아갈 때 내 자신 ‘민간 외교관’이라도 된 듯 뿌듯했다.


이런 노력이 조합원들에게 자신이 속한 노조에 대한 자부심을 주고,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의 동력이 되고 발언권이 된다는 걸 매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활동에 대해 경영진의 참여도 활발해서 노경이 함께 하는 사회사업이 기업 내부 노경의 신뢰를 돈독히 해서 노경파트너쉽을 강화하는 기능도 했다.


나는 노조라면 당연히 큰 집회를 만들고 조합원을 구호 외치게 하고 깃발을 흔들어야 한다는 통념을 벗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투성을 벗는 것, 그래서 새로운 활동의 모범을 만들어 가는 것, 그런 혁신이 LG노조의 힘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노조위원장이 품질과 납기일을 책임지겠다"


노조위원장 첫 임기 3년의 마지막 해인 2001년 말 회사로서 매우 중요한 수주 건이 제기되었다. IBM에 컴퓨터 부품을 납품하는 건이었다.


당시는 세계시장에서 중국의 추격과 대만 업체의 선점에 고전 중이었고, 컴퓨터 부품사업 역시 그런 치열한 경쟁의 한복판에 있던 때였다. 원가 경쟁력 등에서 우리가 중국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수주 건으로 경영진이 노심초사하던 때 미국에서 IBM 부사장이 들어왔다는 걸 확인했다. 회사 실무진들에게 숙소를 확인했고, 경영진을 통해 연락처를 구했다.


방문한 부사장의 오전 일정에 여유가 있는 날, 아침 일찍 연락했다.


“LG전자 노조 위원장입니다. 뵙고 드릴 말이 있습니다.”


부사장은 어렵지 않게 만날 시간을 약속했다. 약속대로 그가 묶고 있던 호텔로 갔다.


인사를 건네니 조금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노조 위원장이 왜 나를'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다짜고짜 용건을 말하고, 약속했다.


“귀 사 제품 건을 LG전자에 맡겨주시면, 10,000명 조합원을 대표하는 노조위원장인 제가 납기일과 품질을 보증하겠습니다. 작업 일정이 촉박하면 제가 잔업을 지휘해서라도 늦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IBM 부사장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몇 번 비슷한 약속과 질의를 주고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입니다. 전체 사원을 대표하는 분이 하시는 약속이니 믿음이 생기고 감동도 됩니다. 잘 판단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날 오후 회사 경영진으로부터 수주 건 성사를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장 위원장님 고맙습니다. 부사장이 인상 깊었다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위원장님을 믿고 맡긴다고 하십니다. 저희 경영진도 함께 책임지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거치면서 나는 한동안 ‘생산과 품질을 책임지는 노동조합’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노동조합의 생산 활동 참여를 확대했다. 품질개선, 작업개선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회사 제품에 대한 모니터링 활동을 독자적으로 벌여, 회사에 개선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중 가장 돋보이는 성과의 하나가 ‘노조가 만든 TV'로 명명된 ’유니온 TV' 출시와 판매였다. LG전자 노조가 상품기획, 시장조사, 개발, 생산, 마케팅, 서비스에 이르는 전 과정에 중심이 되었고, 노경협력 사업으로 진행했다. 노조원의 가족들이 TV 개선안을 모았고 디자인과 기능 개선 방안을 마련했다. 그렇게 해서 2002년 출시된 새 TV는 대리점에서 다른 어떤 TV보다 우선 취급되었다. 노조가 대리점 사장님들에게 일일이 새 TV의 장점을 설명하고 노조원들의 정성으로 만든 TV라는 걸 호소한 게 주효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 노력의 결과로 보통 새 모델 출시 후 3~4만 대가 보통인 TV 판매의 일반적 추이를 훌쩍 뛰어넘어 1년 여 만에 27만 대를 판매하는 대기록을 만들게 되었다.


당시 나와 회사 경영진은 이렇게 노경이 협력해서 신뢰를 기반으로 혁신을 이루어가는 노경관계를 <가치창조의 노경관계>라고 이름으로 회사와 회사 구성원, 노조원의 새로운 성취를 만들어 갔다.


• 노•경이 함께 해외공장 개척


노조 위원장 시절 활동 자료를 보면 가장 많은 사진 자료가 경영진과 함께, 때로는 노조간부들과 함께 해외 현장을 돌아보는 사진들이다.


여러 나라의 생산현장, 소비자들이 모인 현장, 그리고 노동단체 등을 방문해서 그들이 보는 LG, 그들이 보는 대한민국, 그리고 함께 꿈꾸는 지구촌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속에서 글로벌 기업 LG의 성과와 과제를 볼 수 있었고, 세계시장의 각축이 눈에 들어왔다. 자랑스러운 LG가 세계시장의 당당한 주역으로 설 수 있을 때까지 혁신하고 도전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 새길 수 있었다.


이런 문제인식을 LG의 더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노조간부들의 해외연수 역시 적극 권장했다. 해외연수에 회사 측의 협조를 요청했고 조합원들에게도 더 많은 연수 기회가 보장되도록 했다. 일본 도요타, 미국, 중국, 영국, 동유럽, 러시아, 터키 등 LG의 현지공장이나 전자산업의 국제 시장 상황을 알 수 있도록 해외연수를 매년 규모를 늘려가며 지속했다. 나 자신, 그리고 조합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직 혁신의 동력이 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2005년 LG전자 노경 대표단의 미국 연수 중 프로그램의 하나로, 코넬대학을 방문해서 노사문제의 세계적 석학인 해리 키츠 교수로부터 노사분야의 새로운 비전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설명하는 노사문제의 새로운 비전이라는 게 내가 LG전자 노사관계에 대한 평소의 고민, 그리고 ‘노경이 어떻게 신뢰와 존중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를 살피던 문제인식과 완전히 일치하는 걸 보고 놀라기도 했다. 우리보다 앞서서 노동문제의 변화를 살피는 석학의 문제인식이 그러하다는 걸 보면서 내가 하는 노조 활동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한편 내가 노조위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국내 생산기반시설을 외국으로 옮기는 문제 역시 노동조합의 고심거리 중 하나였다. 자칫 국내 기업 노동자들의 일자리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이고, 조합원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기 때문이었다. 노경협의회에서 수많은 논란과 조사도 거듭되었다. 이런 논의와 조사 끝에 LG 노조는 국내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에 대해 원칙적으로 공감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협의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추이를 살피니 생산 공정의 해외이전이 적을 때보다 많아질 때 더 많은 기회가 회사에 있게 되고 일자리 문제 역시 기회와 동반해서 호전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막는다고 일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시장을 개척해야 LG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다만 생산시설 이전 동기가 객관적이어야 하고 국내 생산시설 및 일자리 유지 방안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는 걸 거듭 강조했다. 나는 이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경영진에게 신제품,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 및 R&D 강화 방안을 함께 제시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해외이전을 함께 준비하는 노경체제를 갖추기로 회사 측과 협약를 맺기도 했다.


함께 조사하고 필요성을 검증한 후, 직원들의 고용보장을 원칙으로 세계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혁신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 글로벌기업, 공장의 담을 낮추자!


나는 2008년 1월, 한국노총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LG전자노조 조합원들께 위원장 9년 임기를 마치는 인사 글을 이렇게 썼다.


"지난 9년 동안 동지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지지와 신뢰로 큰 대과 없이 3대에 걸친 위원장의 임기를 잘 마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9년을 되돌아보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LG전자노동조합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 노동조합은 그 동안 한국 노동계에 큰 획을 그어왔습니다. 이미 90년대에 가치창조적 노경관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하여 그 어려웠던 IMF 시기에도 우리는 노경관계의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여 큰 위기 없이 어려운 파도를 넘었습니다. 또한 2000년 이후에는 대기업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사회봉사활동 등 노동조합이 어떻게 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가를 말이 아닌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더욱이 LG전자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데 우리 노경관계는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우리가 앞으로 글로벌 톱으로 가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저는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LG전자노동조합이라는 따스한 품을 떠나, 차디찬 광야에서 새로운 생활을 해야 되지만, 우리 노동조합의 발전을 위한 동지들의 가열찬 활동에 무한한 지지를 보낼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2008. 1. 16 위원장 장석춘)


LG에서 내가 일군 노조 활동은 돌아보면 아련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함께 한 동료들이 고맙고, 누구보다 새로운 경영철학으로 노경관계를 이끈 시대를 앞서간 경영진들이 기억되기도 한다.


내가 다시 노조 위원장으로 돌아간다면 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노동조합 활동의 혁신', '노경관계의 패러다임 전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노경관계',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노동조합'을 주창하고 다짐할 것이다. 그리고 더 당당하고 의연하게 그런 노동조합 활동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노동조합 활동 경험과 문제인식은 내가 속했던 기업 LG, 그리고 LG의 깨어있는 경영진들 없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기업 LG가 내게 '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고 재촉했고, 내게 넓은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인식이 더 많은 노동운동가, 노조간부들 사이에 공감되고 그를 통해서 노동조합 활동의 혁신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가적으로는 국민경제를 책임지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면모가 만들어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국민들의 바람이고 요구이기 때문이다.


글로벌기업의 여러 조건은 수많은 연관업체, 그런 기업의 경영자와 노동자들, 글로벌기업을 키워낸 국민들, 소비자들 없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로벌기업의 성취 역시 공유되어야 한다.


LG를 나온 뒤, 세상의 이러저러한 장면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고 내 마음 속 깊이 새긴 것이기도 하다.


LG, 삼성, 현대, SK... 내로라하는 글로벌기업들은 쌓아올린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상생해야 하고, 나누어야 한다.


내가 LG전자에서 보고 느낀 노조활동은 다른 노동조합들에서도 보편화할 수 있는가.


나는 자신할 수 없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LG를 떠난 후 금속연맹 위원장, 한국노총 위원장 등을 맡으며 다른 노동조합들의 전혀 다른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었다. 노경관계는 노동자를 존중하는 경영진, 경영진을 믿는 노동자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노경관계는 또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런 처지를 견디며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노조간부, 또는 불신의 장벽을 견디며 사업체를 이끄는 경영진들에게 나처럼 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끔씩 내가 몸담았던 기업 LG를 가면 후배들에게 빼놓지 않고 말하곤 한다. "저 공장 밖 세상을 보라! 이 안과 다른 세계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후배에게, 옛 동료에게 하는 말이지만, 나 자신을 다그치며 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석춘 전 한국노총 위원장 약력 


2012년 금탑산업훈장
2002년 은탑산업훈장
1996년 국무총리상

2008.02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2006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련위원장

2015. 12 구미을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