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의 단상] 눈 같은 그대, 조화로운 그대
[간호사의 단상] 눈 같은 그대, 조화로운 그대
  • 김혜선 인재기자
  • 승인 2021.02.15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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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로움

: 서로 잘 어울려 모순됨이나 어긋남이 없다. (네이버 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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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내리는 날이면 외래간호사로 근무하던 어느 겨울날이 떠오른다. 눈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진 그 날, 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는 외래진료가 끝나갈 무렵 우리 감염내과의 모든 전문의 선생님들과 상담간호사들을 소집하여 정원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외래간호사의 “눈 오는데 사진 찍어요!” 라는 호출 한 번에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기꺼이 모두 나온 선생님들. 모두들에게 기쁨이었던 그 순간, 우리는 눈 오는 날의 풍경이자 주인공이었다.

서울에 함박눈이 날렸다. 첫눈은 아니지만 소담하고 포실포실한 눈이 쏟아졌다. 정호승 시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리며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이 내린다.’고 했다. 그대에게는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이 있는가? 그 그리움의 대상과 결은 다를지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마음이라는 뿌리는 같을 것이다.

첫눈은 조화롭다. 세상의 밑그림이 어떠하든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몸 전체로 감싸는 후덕함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시각적으로는 포근하지만 눈의 실상은 차갑다. 이런 이중적인 구조가 묘하게 어울려 첫눈 오는 날은 사람들로 하여금 설레게 하고 기쁨의 순간이 되게 한다. 날카롭고 이지적이며 자기 색깔이 선명한 사람은 개별로 있을 때는 돋보일지 모르나 조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날카로운 자신만의 잣대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잘라버리는 그 무자비함은 섞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첫눈처럼 따뜻함을 풍기며 이성의 차가움과 정확함과 결단력은 자신을 향해야 한다. 사람들은 눈처럼 감싸주며 따뜻함을 전해주는 이들과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을 뿐 아니라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하얀 눈을 배경으로 따뜻한 사람들과 풍경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에 풍경은 조화로움이며 푸근함이다.

‘조화로움은 자신이 놓여 있는 장소에서 곁에 있는 다른 존재와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존재에게 편안하게 곁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내 색깔만을 너무 강요하지 않으면서 나와 색깔이 다른 곁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정육, 『좋은 그림, 좋은 생각』중에서>

우리는 여행을 꿈꾼다.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기억되는 추억은 여행의 장소보다는 같이 갔던 일행들과 보냈던 시간들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시간을 함께 한 그 자체가 가장 큰 추억인 것이다. 즉 명소이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서가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순간들의 ‘조화로움‘이 좋았기에 그곳이 특별해지는 것이다.

시인은 그의 시에서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 나는 늙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첫눈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건 내 마음에 작은 사랑의 불꽃을 다시금 심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는 의지의 표현 말이다. 이 겨울, 그대에게 좋은 새해계획을 제안해본다. 똑똑해지는 것보다 따뜻해지며 내가 있는 배경에서 조화를 이루며 화음을 만들어가는 이가 되겠다는 계획을 말이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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