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동 쪽방촌, 홈리스와 친구 하기!
동자동 쪽방촌, 홈리스와 친구 하기!
  • 김병화 작가
  • 승인 2021.06.05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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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지 않겠습니다.

성경 사무엘상2장 12~26에 보면, '여기, 사환의 손에 갈고리를 쥐어주며 고약한 미소를 짓는 두 소년'이 있다.

백성이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낚아채 오라고 사환의 등을 떠미는 홉니와 비느하스.

갈고리에 덧입혀진 당대 최고의 영적 권위자들의 삐뚤어진 욕망을 움켜쥔 사환은 백성의 제물을 무참히 휘젓는다. 백성은 빼앗겨야 할 이유조차 모른다. 그저 갈고리를 솥 안으로 밀어 넣어 걸려 나오는 고기를 두 소년의 소유로 정한다. 성경은 그들을 소년이라고 기록했다. 보송한 솜털이 삐죽하게 올라온 앳된 피부 아래 시커먼 탐욕이 일렁거린다. 소년들의 욕망은 삶은 고기에서 멈추지 않고 생것을 원하기 시작한다. 백성은 하나님의 규례를 상기시키며 기름으로 태운 후 취하라고 저항하지만 사환은 고기를 찔러대던 갈고리를 빼들어 비릿하게 웃으며 응수한다.

“억지로 빼앗으리라.”

두 소년의 죄가 심히 큼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을 막고 막강한 권력의 진압봉을 치켜들어 백성의 자유를 통제한다. 브레이크 없던 형제의 악행은 육체의 성장과 맞물려 더 흉측한 형태로 자라나고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에 이른다. 백성의 입에서 터져 나온 탄식은 간절함의 순풍을 타고 마침내 엘리에게 도착 하지만 늙은 아비에게는 두 아들의 악행을 멈출 힘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다. 엘리를 향해 걸었던 기대가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 하나님은 뜻을 보이신다. 징벌은 참혹했다. 하나님이 주신 빛나는 자리에서 약탈만 일삼던 두 아들에게 이제는 너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겠다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죽이리라.”

누가 빼앗고, 누가 빼앗기는가.

힘이 센 사람이 빼앗는다. 단순한 논리가 복잡한 인간군상의 얼굴을 하나의 몽타주로 만들어낸다. 빼앗는 자. 대단한 권력가가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시민들은 자신에게 타인을 속박할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 평범함은 보편성이라는 거대한 힘의 지반위에 안착해있다. 그 땅은 웬만해선 끄떡도 않는다. 보편성의 기준에 들어오지 못하는(매우 상대적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땅을 밟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벼랑 끝에 비틀비틀 서 있는 사람들을 지대 밖으로 차버린다. 절망의 먹이가 되도록. 어느 날, 타인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를 부지불식간에 뺏고 있던 나의 무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2020년, 코로나19의 등장은 봄의 여왕인 벚꽃의 춤사위를 영상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국민들은 낯선 침입자의 윤곽을 잡아내기 위해 밤낮없이 뉴스 앞으로 모여 들었고 실시간 뿌려지는 정부의 정책에 고함을 치거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전염의 괴력은 머지않아 국민의 건강과 경제, 심지어 정서까지 갉아 먹었다. 정부는 국민의 불안을 잠재울 가시적인 대책이 시급했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재난지원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0.5%의 국민은 지원금을 마다하고 기부를 선택했다. 상류층일까? 거주불명등록, 서류, 신분증 등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거리홈리스들은 강제 기부자가 되었다. 보편성의 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들어 손쉽게 신청하는 동안 홈리스는 단단히 걸어 잠근 철문 밖에서 외로이 스러져 갔다.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대다수의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아 뜨끈한 한 끼의 추억마저 흐릿해진 홈리스에게서 빼앗은 건 지원금이 아니라 생명이다. 기사를 읽고 잠시 멍해졌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씨는 평등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자의 불평등이 감소하면 강자의 불평등이 증가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논리를 버려야 한다. 누군가의 불평등이 감소하면 모두가 평등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는 사실을 새겨야만 한다고, 따라서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단순히 효율에 의해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제외되는 사람 없이 ‘정의’에 의해서 흘러야 한다고 호소한다.

제외시킨다는 건 빼앗겠다는 의지다.

지하철 역사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산물이지만 대한민국 곳곳에서 홈리스에 대한 강제 퇴거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인생의 고달픔을 봇짐에 주렁주렁 매달고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던 홈리스가 겨우 눈을 붙인 심야 시간대에 자행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잠결에 쫓겨난 황망한 기분은 어떨까.

난 오랜 시간 약자의 테두리 밖으로 홈리스를 몰아냈다. 게을러서 그런 거지, 노력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 몸이 멀쩡한데 막노동이라도 해야지.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들이 무엇을 빼앗기든 다수를 위한 합당한 조치처럼 여기며 살아왔는데 재난지원금에서 제외 됐다(본질은 그러하다)는 기사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었다. 몇 날을 방안에 박혀 기사와 책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읽고 마음으로 따라가 보았다. 무관심, 무지, 오해라는 자숙의 단어로도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이 곳은 서울 동자동 쪽방촌에서 홈리스를 돕고 있는 작은자 교회(최화성 담임목사)다. 일 년째 일주일에 이틀씩 봉사하고 송언주 자매와 홈리스에게 드리는 도시락 배달을 마치고 숨을 고르고 있다. 예전에 집수리봉사 고작 하루 따라갔다가 중간에 도망친 기억이 떠오른다. 앉아서 가르치거나 상담하는 건 몇 시간도 할 수 있는데 몸 쓰는 일은 영 재주가 없다.

정신이 돌아와 주길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정신지체 3급인 쪽방주민 이삼열(가명)씨가 오셔서 얼음 동치미처럼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이야기를 먹여주신다. 중간 중간 알아듣지 못할 발음들이 새어나와 멈칫했지만 최화성목사님과 언주 언니의 미소에는 익숙함이 묻어있다. 이곳에서는 이삼열씨가 아닌 내가 이방인이었다.

사실 나는 비위생적인 식당(죄송하지만)에서 밥 먹는 것을 힘들어한다. 코도 예민하다. 몇 년 전 친구와 길을 걷는데 소고기 냄새가 계속 나는 거다. 친구는 슬슬 배가 고픈 거라며 웃으며 넘겼지만 얼마를 더 걷다 소고기를 굽는 일행을 발견하고 깔깔 웃었던 추억이 있다. 개코 인증 마크를 달아도 될 것 같다. 집수리 봉사 도주사건 이후로 마음이 무거워도 양 발은 돌처럼 무겁게 떼리라 다짐했건만. 나는 왜 수요일마다 이곳에 와 있는가.

한 달 전쯤이었다. 나는 영화계 종사자들이 들으면 절대 안 될 거라고 예단하는 소재에 착수했고 오랜 현장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향해 내달린 지 4년이 된 지금 작업했던 소재들과 방향성을 잠시 등 뒤로 던지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인터넷에서 동자동, 쪽방, 노숙인 이라는 키워드로 어렵지 않게 검색된 인물이 작은자교회 최화성 목사님이다. 목사님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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