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작은 섬 소무의도에 주민들의 다리가 되어준 삼륜오토바이 사역자를 만나다.
[인터뷰] 작은 섬 소무의도에 주민들의 다리가 되어준 삼륜오토바이 사역자를 만나다.
  • 권기숙 인재기자
  • 승인 2021.08.02 11: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섬마을과 도시를 이어주는 삼륜오토바이 사역자
소무의도 무의교회 이상환 목회자를 만나다

이상환 목사님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역자였습니다. 그런 분에게 하나님께서는 소무의도라는 작은 섬마을 사역을 맡기셨고, 목사님은 10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민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역에 함께하는 삼륜오토바이는 이제는 마을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이동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섬마을에서 오늘도 사역을 감당하시는 이상환 목사님을 비대면(줌) 인터뷰로 만나보았습니다.

 

기자 : 안녕하세요? 목사님 TOP NEWS 독자분들께 먼저 소개 부탁드립니다.

​목사님 :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에 작은 섬 소무의도 안에 있는 무의교회 이상환 목사라고 합니다.

​기자 : 네. 반갑습니다. 목사님! 현재 소무의도 사역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목사님 : 제가 2011년 8월에 무의교회로 파송을 받고 들어왔으니까 다음 달 8월이 되면 10년이 됩니다.

 

무의교회 전경 사진
무의교회 전경 사진

​기자 : 10년간의 섬생활이 결코 쉽지 않으셨을텐데 소무의도 사역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어요?

​목사님 :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안양감리교회'라는 성도가 많은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섬 교회에 자리가 있는데 가보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 담임 자리가 생기면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으로 사전 조사없이 순종하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곳이 주님께서 주시는 목회지라고 믿고 무의교회로 오는 것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목사님께서는 어느 곳에 있는 교회라고는 말씀을 안하시고 다음 날 이곳 무의교회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이곳에 한번 와보게 되면서, 그때부터 무의교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삼륜오토바이 사역자 이상환 목사님
삼륜오토바이 사역자 이상환 목사님

​기자 : 사역 중에 가장 보람 있었던 일과 가장 어려웠던 일이 있었다면 어떤 부분이었나요?

​목사님 : 이곳 소무의도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작은 섬입니다. 하지만 주민들은 동인천에 장을 보러 가거나 병원을 가야 하는 일로 나가야 했습니다. 대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잇는 해상 인도교가 있습니다. 거리가 414m의 아치형 다리인데 주민들은 그 다리를 건너기 힘들어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그 할머니는 다리가 개통되고 난 뒤에도 소무의도 밖으로 나가신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다리가 아프시고 불편하셔서 인도교를 건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계기가 되어서 '어르신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삼륜오토바이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삼륜오토바이는 비나 바람을 막아주는 천막을 치고 사람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해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삼륜오토바이 사역을 9년 동안 하고 있는데요.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2015년에 오토바이 운전을 동에서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패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서 인천 중구까지 소문이 좋게 나면서 '구민의 날' 행사에서도 감사패 표창을 받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삼륜오토바이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니는 것이 믿는 분들이나 믿지 않는 분들에게 귀감이 되어서인지 표창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인천 중구 구민의날 행사 감사패 수여식
인천 중구 구민의날 행사 감사패 수여식

무엇보다도 감사했던 건 그날 20명의 수상자들이 있었는데 주민 이상환이 아닌 무의교회 목사 이상환으로 인쇄해 주셨고, 구청장님께서 저에게 눈을 마주치시면서 '지역을 위해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목사도 주민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구나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일이 아무래도 제가 사역하던 중에 가장 보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들었던 일은 사모인 제 아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섬이라는 지리적인 조건이 외롭고 힘들고 쓸쓸한 곳이고 더군다나 사모라는 직책을 갖고 있어서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많이 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친구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도 없어서 내면을 해소할 수 적절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가 가장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전적으로 감싸 주지 못하고, 좀 더 따뜻하게 이야기하지 못해서 첫 2~3년 동안에는 많이 다퉜습니다. 다행히 4~5년에 접어들어서는 다투기보다 서로 이해하고 어려운 일들을 잘 극복하면서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아내가 제 사역에 큰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뿐만 아니라 마을에 계시는 주민들과도 잘 지내면서 소무의도의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써 많은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기 이전 사역(무의교회 추수감사절)
코로나시기 이전 사역(무의교회 추수감사절)

​기자 : 코로나 시기 이전 사역과 현재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목사님 : 코로나 이전에는 주일날에는 본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이 고령이시다 보니 매주 금요일마다 속회예배(소수의 가정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친교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모임)를 드리는 인도자로 각 가정을 돌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희 무의교회는 성도들의 사역 뿐만 아니라 수양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도심의 교회들이 작은 섬에 와서 섬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하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서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수련회를 가졌었습니다. 현재는 속회예배도 중단된 상태이고, 집합 금지가 이루어져서 수련회로 모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 이전 사역 (성도님 가정심방)
코로나시기 이전 사역 (가정심방)

도시 교회의 경우 비대면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지만 저희는 온라인 예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어르신 대부분께서 연로하신 고령자이셔서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저희는 주일 전날, 출력한 예배문 봉투에 성도님 성함을 한 분 한 분 라벨지로 붙여 미리 준비해 놓습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 9:30에 사모와 함께 예배문를 가지고 가정마다 방문하면서 안부를 여쭤보고 한 주간 불편한 부분은 없으셨는지 또 자녀분들의 안부와 손주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주일 말씀에 대한 부분을 나누고 기도해 드리고 나옵니다.

​현재 9개 가정을 다니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을 다 만나고 와서 11시가 되면 교회 종을 칩니다. 종의 의미는 '11시에 가정예배를 시작하십시오'라는 시작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종소리를 듣고 나눠드린 예배문을 가지고 가정에서 예배를 시작하게 됩니다.

 

​기자 : 섬이라는 지리적인 제한조건이 있으신데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목사님 : 저에게 두 딸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무의교회 부임을 할 때 4살, 2살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섬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저희 아이들 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꽃게도 소라도 잡고, 썰물일 때는 갯벌에서 돌게도 잡으면서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통해 아이들의 감성이 자연스럽게 자랐습니다.

​인성교육 부분에서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작은 섬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까 노인정에 가서 재롱도 부리면서 어르신들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어른들을 공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인성교육으로 이어졌습니다.

​지성적인 부분은 도시 아이들의 경우는 방과 후에 국영수 주요 과목과 예체능 학원을 많이 다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아이들에게 그런걸 제공해 줄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는 대무의도에 분교가 있어서 그곳으로 학교를 보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도시의 아이들과 경쟁력이 있을까 그런 부분이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그래서 큰아이가 초등 1학년 시기에 TV를 없앴습니다. 이유는 도시의 아이들은 방과 후에 학원도 가고 친구들과 만나면서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데 저희 아이들은 시간이 많아서 집에 오면 리모컨을 잡고 텔레비전을 켜는 것이 가장 1순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 아이들보다 텔레비전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모가 꾸준하게 아이들 학습을 봐줬습니다. 큰아이는 중학교 1학년인데 지금까지도 엄마가 학습을 지도해 주고 있습니다.

​감사했던 건 지난 3월에 저희가 걱정했던 부분을 한순간에 내려놓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영종 인천하늘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학교는 저희 아이와 다른 뛰어난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였습니다.

​3월 둘째 주에 초등학교 학습능력 평가 시험을 봤습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점수가 나왔을까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주일 뒤에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아내가 울먹거리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 6년 동안 해왔던 수많은 걱정과 근심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교육적 환경이 열악함에도 제가 목회에 집중하면서 성도들과 이웃분들 속에 복음을 전하면서 지나왔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큰아이가 좋은 결실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이는 정말 감사하게도 학교에 6학년 학생으로는 저희 아이가 혼자여서 선생님이 집중적으로 케어하고 지도해 주십니다. 선생님은 공교육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아이가 모르는 부분은 꼼꼼하게 가르쳐 주시고, 잘하는 부분은 칭찬해 주시면서 일대일 격려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둘째 아이는 학습에 대한 성취도가 많이 높아졌습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교회 학교 운영이 어려워서 코로나 이전에는 사모가 주일 예배 후에 아이들에게 30분 정도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건넛 마을에서 아이가 한 명 왔습니다. 주일 대예배는 아이들이 어른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고. 예배 후에는 식사를 나누고 아이들 세명이 공과를 가지고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코로나시기 이후 사역
코로나시기 이후 사역

​기자 : 목사님께서 사역에 전념하실 때 자녀분들의 감성과 인성, 지성까지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고 생각되니 정말 놀랍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목사님의 목회 철학과 사역의 방향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님 :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지나온 10년을 한번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됐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 철학이라고 한다면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하고, 성령님을 우리의 보혜사로 고백하고 있는 많은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것이 목회의 철학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송가 323장의 부름받아 나선 이 몸이라고 하는 제목인데요. 이 찬송가는 제가 신학생일 때도 많이 불렀던 찬송가였고, 목사 안수를 받던 날에도 부르며 결단을 했던 찬송가였습니다.

​1절은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다' 이렇게 이어지고 2절은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저는 목회 철학이 환경을 바라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한 곳에 들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소박한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철학을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섬교회 사역을 10년 넘게 이어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만약에 제가 큰 교회에 대한 목회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저는 아마 이 교회에서 3년이라는 필수의 시간만 채우고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말씀이 필요한 교회에서 신실하게 목회하자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달려왔고, 또 앞으로도 이러한 목회 철학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지금 이 마을에 35명의 주민이 있습니다. 예배 인원은 18명인데 이 마을에서 모두 오시는 건 아니고요. 인천 도심과 부천에서 오셔서 18명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마을에는 20명이 넘는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오토바이로 어르신들을 모시는 일이 마을 분들의 마음을 많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을분들은 저를 목사이면서 마을의 한 주민으로 편하게 생각해 주십니다. 목회자의 모습을 높이 평가해 주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시는 것을 봅니다.

​조금만 더 그분들에게 예수님의 참된 사랑을 보여준다면 그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확신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사역도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나가서 이웃분들에게도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그런 목회를 꿈꾸며 계획하고 기도하고 나가려고 합니다.

​기자 : 목사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