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의 단상] 사람은 땅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간호사의 단상] 사람은 땅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 김혜선 인재기자
  • 승인 2021.08.25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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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이 말라 물고기가 모두 땅 위에 드러났다. 서로 물기를 뿜어주고, 서로 거품을 내어 적셔주지만, 강이나 호수에서 서로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요임금을 칭송하고 걸 왕을 비난하지만, 둘을 다 잊고 도道에서 변화하여 사는 것이 훨씬 더 좋다.”(장자, 「대종사」)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삶의 터전이 우물일 수도, 시냇물일 수도, 바다일 수도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삶의 터전인 샘은 물이 다 말라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다급하고 막다른 상황.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현실. 그 참혹한 현실에서 물고기들은 자신의 물기를 뿜어내 상대를 적셔준다. 자신도 죽어가는 상황이면서 말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임시방편임을 알면서도 서로를 그렇게 돌본다.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레바퀴 자국에 패인 그 물속에서도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도움을 주는 존재다. 장자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수레바퀴의 고인 물에서 살 것이 아닌 타고난 그대로 살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터전이 고인 물인지조차 모르는 삶도 있고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삶도 있다. 삶의 모습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며 살아가겠다는 이유로 현재와 책임을 등한시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꿈과 비전은 나의 발전과 더불어 가까운 이들이 기뻐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 생명력이 있다. 김미경 씨는 말했다. “꿈은 생계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가장이 꿈을 성취하겠다고 생계를 뒤로 한 채 자신만 빠져나와 가족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다면 설령 꿈이 이루어졌어도 지속되긴 어렵다. 그렇다면 현실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는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바라본다." 라고 말했다. 현실이 시궁창일지라도 별을 바라보며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건 해결책이 아닌 무책임함이다. 꿈은 어른이 되었으니 그만두어야 할 유치한 무엇이 아니다. 살아갈 힘을 주고 꿈꾸게 하며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원동력이기에 항상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무엇이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안다. 저 사람 안에 꿈이 꿈틀거리며 생기가 발산되는지 마른 나뭇가지처럼 하루하루 연명하듯 살아가는지를 말이다.

 

꿈을 지향하며 살아가다 보면 내 현실이 수레바퀴의 고인 물에서 샘물이 솟는 옹달샘이 될 수도 있고 시내를 이루다가 강이 될 수도 있다. 장자는 타고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사는 것이 조화라고 했다. 긍정과 자유를 넘나드는 존재인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흐르는 물과 넓은 호수에서 서로의 몸을 적실 일 없이 사는 삶을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러한가?

 

그렇다고 현실을 비관하면 메마름만이 더해질 뿐이다. 여기 팍팍한 삶이지만 자신만의 기쁨을 지니고 있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의 주인공 폴이다. 폴은 박사 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일단 생활비라도 마련하려고 택시 기사가 된다. 그는 비만에 여자 친구도 없다. 남들이 자신을 패배했다고 생각할까 봐 끊임없이 변명을 늘어놓는다. 소설 속에는 그가 애써 택시 기사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있다.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뒤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몸은 뒤로 남겨놓은 채 충만함과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들어가는······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느끼게 되는 일말의 해방감? 잠깐 동안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희열,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폴이 새벽 세 시 반의 보름달을 바라보는 순간의 황홀함은 현실을 넘어서는 충만한 기쁨이다. 삼교대의 피곤함 속에서 나를 지탱해 준 건 하늘의 풍경이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근할 때의 남색 하늘이 엷어지는 광경, 또 아침 해가 연주황 빛으로 광활한 하늘을 조금씩 뒤로하고 나오는 모습, 온통 까만 밤하늘에 하나둘씩 떠오르는 아가별들. 그 모든 풍경은 나의 피곤함을 잊게 해주고 하늘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정을 선물해 줬다.

 

‘사람은 땅 위에 시적으로 거주한다.’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글이다. 시인은 바람에 색을 칠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도 바람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 일수 있다. 그 스침의 순간에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려고 공들이며 애쓰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삶을 스쳐가는 바람과 같을지라도 그냥 보내지 않고 나만의 길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이 시적으로 땅 위에 거주하는 삶일 것이다. 삶은 나만의 빛 고운 색으로 물들이는 과정의 연속이고 물들임은 시적인 순간들의 합인 셈이다.

 

나의 두 다리는 항상 현실 위에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눈은 안개 너머의 숲을 바라보아야 하며 눈망울에는 안개의 습기를 담뿍 담아 촉촉하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안개너머의 숲이 험난해 보일지라도 저벅저벅 걸어가는 용기와 의지, 도전이 있어야 한다. 안개가 휘감고 있어 보이지 않고 넘어질 것 같지만 일단 들어가서 잠시 머물다 보면 희미한 속에서도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세계에 어느덧 원래 내 자리였던 것처럼 살아가게 된다. 꿈꾸던 안개 너머의 숲을 현실로 만들고 나의 이야기를 계속 전개해가게 되는 삶, 고인 물에서 호수와 강이 되는 삶, 그 삶이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며 별을 바라보는 삶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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