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민족대표 33인 유여대 목사
3·1운동과 민족대표 33인 유여대 목사
  • 김변호 기자
  • 승인 2024.03.02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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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교육계몽에 이바지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유여대(劉如大,1878~1937.목사)열사.
독립운동가 유여대(劉如大,1878~1937)목사.

올해로 105주년 삼일절을 맞이했다. 이에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제일행복한교회 강충구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는 강충구 목사의 아내 유명화 사모의 증조 할아버지시다.

강 목사는 교회 입구에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 자료로 사용한 유여대 목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볼수 있게 했다.

유여대(劉如大,1878~1937)목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낙포(樂圃)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5년에는 직접 서당을 운영하였다.

1898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를 만나 의주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899년 의주 최초의 근대 학교인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한문교사로 재직하였다. 1902년에 의신소학교, 1905년에 양실학원을 세웠으며, 1908년에는 두 학교를 양실학원으로 통합하였다. 1907년부터 의주동교회에서 영수(領袖)와 장로로 활동하였다. 1910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의주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유여대 열사가 세운 양실학교 모습. 사진=CTS캡처.
유여대 목사가 세운 양실학교 모습. 사진=CTS캡처.

1919년 2월 13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양전백, 김병조, 이명룡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서울의 천도교단이 독립운동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참을 약속하였다. 의주로 돌아와 양실학교 교사 정명채와 김두칠을 만나 의주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모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원래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군경이 행사를 교란시킬 것을 경계한 박희도의 건의에 따라 장소를 바꾸었다. 기독교계의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미참하였다.

당시 유여대 목사는 이승훈 장로의 권유로 민족 대표로 참여했지만, 서울 태화관의 독립선언서 낭독에는 참석하지 않고 평안북도의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유 목사는 3.1운동 당시 의주동교회의 담임으로 상당한 정치적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지지를 많이 받고 있었다.

당시 유 목사는 태화관에 참여하는 대신 의주라든지 평안북도의 독립만세 운동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고 또 그렇게 리더를 해 나가셨습니다. 또한 유 목사는 양실학교와 일신학교를 설립해 후학 양성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다. 특히 여성들 교육에 힘써왔고,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이 설립한 민족운동단체인 신민회에도 가입해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유여대 목사의 꾸준한 독립운동을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인정해 임시정부의 정보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교통국 지부를 유 목사가 있는 의주읍에 설치하게 된다. 이 조직은 독립을 위한 정보국 조직으로 국내에 조직원을 파견해서 국내 단체와 독립운동 단체들을 조직하고 기금을 마련해서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일을 하게 된다.

유여대 목사가 북측 곳곳에서 이끌었던 부흥사경회에는 수백 명이 모일 정도로 목회자로서 큰 역할을 했으며, 교육가로서, 민족운동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체포된 직후 사진 유여대 열사.
체포된 직후 사진 유여대 목사.

2018년 7월호 기독교사상에 김승태 교수가 기고한 글을 보면, 당시 유여대 목사가 민족 독립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또한 3월1일 만세운동 이후 체포된 후에 일본 헌병대에게 신문과 고문 가운데서도 독립선언식을 지휘한 지도자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와 신념을 확고하게 밝혔다.

1919년 3월 4일 오후 독립선언식 직후에 안석응(安碩應), 김창건(金昌健), 김두칠(金斗七), 장창식(張昌拭), 강용상(康龍祥), 정명채(鄭明采) 등과 함께 헌병경찰에게 체포되어 의주헌병분대에서 신문을 받고, 3월 4일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 이송되었다. 3월 7일 신의주지청 검사에게 신문받는 내용을 보면 그의 자주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문 : 이들의 문서나 기 등은 모두 그대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 틀림없는가.

답 : 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문 :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번과 같은 소요를 일으켰는가.

답 : 양전백의 말에 의하여 조선민족 대표자로부터 파리의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일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통지하면 강화회의에 독립 요구를 제출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고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다.

문 : 가령 조선이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전의 조선과 같이 당파의 싸움과 각국의 야심 등으로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수 없고 도리어 국내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지 않았는가.

답 : 국민 전부가 독립 정신이 충만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문 : 가령 정신만 있다고 할지라고 실력이 수반하지 않는 이상은 독립을 오래 지탱할 수 없지 않은가.

답 :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후 검사는 3월 8일 이들 모두를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청에 기소하였으나, 사법부 장관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재판을 경성지방법원에서 취급하라는 총독의 명령이 있으므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하라는 전보를 받고,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 이송하였다. 이 사건을 인계받은 경성지방법원은 4월 8일 이들의 공판을 당시 “예심계류 중인 손병희 등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의 예심종결에 이르기까지 이를 정지”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유여대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사경회모습.사진=CTS캡처
유여대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사경회 모습.사진=CTS캡처

유여대 목사는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참고인으로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을 때도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토로하였다.

문 : 정부의 승인을 거친 후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전에 피고 등은 어찌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는가.

답 : 그것은 자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문 : 참고인은 어찌하여 일본의 주권을 이탈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희망하는가.

답 :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립을 희망한다.

문 : 일본 제국신민이 되어 있는 편이 자유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독립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 병합 전은 인민은 자유를 압박받고 있었으나 독립을 하여서 그와 같은 상태로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 그대는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데 불평이 있는 까닭이다.

9월 20일부터는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공판 3일째인 9월 22일 유여대 목사에 대한 판사의 법정 신문이 있었는데, 여기서 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그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노라.”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는 유여대 목사에게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징역 2년에 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을 형기에 산입하도록 판결했다.

상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된 유여대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천도교의 홍기조 도사와 함께 1921년 11월 6일에 만기로 출소하였다. 1921년 11월 7일 자 「동아일보」는 그의 출옥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아일보 11월 6일자] 9시 10분에 류여대(劉如大) 씨가 역시 깨끗한 의복으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옥문 밖에 나타내며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에게 일일이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역시 미리 준비하였던 자동차로 돌아왔는데, (류여대) 씨는 옥중 감상을 말하되 우리들에게는 옥리들도 그리 가혹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죄수를 다루는 것을 보면 때때로 몹시 때리는데 아무리 죄수라도 너무 불쌍한 생각이 있었으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출옥한 후에 대하여는 모든 일이 순서가 있고 세월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힘을 쓸 뿐이라 하더라.

유 목사는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자마자 의주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3・1운동으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5년 2월에 그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1년 20여 년간 시무하던 의주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나 1934년 병을 얻어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도 후학들을 위해서 민족 계몽적인 저술 활동에 힘써,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년 1월 13일 자택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59세 일기로 별세하였다. 1962년에 우리 정부는 그에게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71년 1월 20일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가묘를 마련했다.

제일행복한교회 강충구 목사가 교회 입구에 전시한 유여대 열사 자료를 보며 김변호 목사에게 설명하고 있다.
공주 제일행복한교회 강충구 목사가 교회 입구에 전시한 유여대 목사의 자료를 보며 김변호 목사에게 설명하고 있다.

강 목사는 “우리 후손들이 독립운동가들에게 모두 빚진자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애족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유여대 목사님은 아내 유명화 사모의 증조 할아버지시다. 우리가 5대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이다. 목사님은 수 백명이 모이는 부흥사경회를 이끈 영성가이며, 영혼구원에 앞장서 민족 구원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교육가로서 교육 계몽에도 힘써왔으며, 민족 운동가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셨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유 목사님의 정신을 잊지말고 받들어 기리고 계승해야할 거룩한 책임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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