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 마지막 남긴 말 '생명유도(生命有道)'
3·1운동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 마지막 남긴 말 '생명유도(生命有道)'
  • 김변호 기자
  • 승인 2024.03.1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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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이자 목회자, 민족지사로서 평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의 6대 후손 강충만씨가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의 6대 후손 강충만씨가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사진=KTV캡처

충남 공주에 있는 제일행복한교회 강충구 목사의 아내 유명화 사모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독립운동가 유여대(劉如大,1878.11.28.~1937.1.13)목사의 5대손이다. 유 목사는 유명화 사모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는 1934년 신병(身病)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 후학들을 위해서 계몽적인 저술 『강대지남』(講臺指南),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출판하였다. 저술 활동을 하는 중에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년 1월 13일 자택에서 끝내 별세하였다.

교육자이자 목회자, 민족지사로서 평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는 자택에서 별세하면서 아들 삼형제에게 최후로 남긴 필담은 '생명유도(生命有道)'였다.

제일행복한교회에는 독립운동가 유여대 목사를 알리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여대 목사는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에서 1992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매년 선정하여 공표하는 ‘이달의 인물’로 2003년 3월의 인물로 선정되어 소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여 후손에게 전달했다.

삼일운동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중에서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 목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 현장의 군중들과 함께 직접 만세시위에 참여하며 시위대를 지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이 월간 기독교사상(2018년 7월호)에서,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에는 참여하지만, 서울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평북 의주 지역 일대의 독립선언식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대로 1919년 3월 1일 의주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 목사가 주도한 의주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다.”고 밝히고 있다.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당시 유여대 목사.
제8회 평양신학교 졸업 당시 유여대 목사.

유여대 목사는 평안북도 의주(義州) 출신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호는 낙포(樂圃)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5년에는 직접 서당을 세워 운영하였다.

유여대는 1878년 11월 28일(호적에는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사숙하여 18세 되던 해인 1895년 자택에 한문사숙을 열고 훈장을 맡았다. 안승원(安承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의주 서교회(西敎會)에 출석하면서 20세 무렵인 1898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위대모 魏大模. N.C,Whittemore)에게 세례를 받았다. 1899년 휘트모어, 장유관(張有寬), 김창건(金昌健) 등과 함께 의주 최초의 근대 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고 한문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교육을 하였다. 1905년 서교회에서 운천교회가 분립하고 부설학교 의신소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서교회에서 여자교육기관 기독교 양실(養實)학원(양실중학교)을 확장할 때 최광옥, 이성하 등과 함께 교원으로 있었다. 1908년에는 의신소학교와 얄실학원을 양실학원으로 통합하고 심상소학부(4년), 고등소학부(3년), 중학부(3년)의 과정을 두었다.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의주 동교회(東敎會) 영수로 있다가 1911년 그 교회 조사를 맡았다. 1914년 8월 동교회 장로로 장립되고, 송장면교회, 수진면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사업을 하다가 1915년 6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여,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모교회인 동교회를 담임하였다. 1917년 9월 평북노회 총대로서 제6회 조선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안식년 휴가 중인 휘트모어 선교사 대리로 학무위원을 맡았다. 1918년 11월 평북노회에서 의산노회(義山老會)가 분립될 때, 창립총회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 의주 동교회를 담임하면서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퇴치와 민중계몽 운동에 힘쓰다가 3・1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무렵 동교회 교인은 300여 명이었으며 성도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지지가 높았다.

여성 계몽운동을 위한 기독교 양실학교.
여성 계몽운동을 위한 기독교 양실학교.

유여대 목사는 1919년 2월 13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양전백, 김병조, 이명룡과 함께 이승훈으로부터 서울의 천도교단이 독립운동을 제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참을 약속하였다. 의주로 돌아와 양실학교 교사 정명채와 김두칠을 만나 의주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논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원래의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군경이 행사를 교란시킬 것을 경계한 박희도의 건의에 따라 장소를 바꾸었다. 기독교계의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미참하였다.

당시 유여대 목사는 이승훈 장로의 권유로 민족 대표로 참여했지만, 서울 태화관의 독립선언서 낭독에는 참석하지 않고 평안북도의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 군중들을 이끌었다. 당시 유 목사는 태화관에 참여하는 대신 평안북도의 독립만세 운동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일으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유 목사는 3.1운동 당시 의주 동교회의 담임으로 상당한 정치적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성도들의 신임과 지지를 많이 받고 있었다.

유여대 목사의 저서소개 동아일보 1935.9.3일자 기사.
유여대 목사의 저서소개 동아일보 1935.9.3일자 기사.

기독교사상 2018년 7월호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이 기고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글에 보면, 당시 유여대 목사가 주도한 의주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찬미가 (2)기도 (3)식사(式辭) (4)독립선언서 낭독 (5)독립창가합창 (6)만세 (7)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 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백 수십 매도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를 하였다. 서울에서 준비한 독립선언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동경의 2・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그날 새벽에 등사판으로 등사한 선언서를 낭독하려 할때에 마침 서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40-150매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助事)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담아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김두칠, 정명채, 김이순, 김창건, 강용상 등은 그곳에서 준비한 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배포하던 것을 중지하고, 서울에서 선천을 거쳐 그때 막 도착한 독립선언서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립 창가>를 사람들과 함께 합창했다.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天帝)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이어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학생을 선두로 독립만세와 <독립 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헌병경찰은 유여대 목사 이하 주동자 7인을 헌병대에 구속했다. 이날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유여대목사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유여대목사의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3월 2일 시위부터는 천도교 측이 가세하여, 의주 남문 밖 광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인근 지역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날 오후에는 기독교인과 주민 3,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30명이 체포되었다.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몇 개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유여대 목사와 함께 의주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김병조 목사는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주는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김승만(金承萬), 장덕로(張德櫓) 등 4인이 음력 정월 10일(양력 2월 10일)에 평북로회(平北老會) 축하차 선천(宣川)에 가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10여 명의 동지와 더불어 국사의 광복을 공의(共議)한 후, 의주 일경(一境)의 일은 4인이 분담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密布)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서울)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즉시 이원익(李元益), 김창수(金昌洙), 안석응(安碩應) 3인으로 하여금 선언서를 도청(道廳)과 군청(郡廳) 및 경무국(警務局), 헌병대(憲兵隊)에 전치(轉致)하고 시민에게 고루 전한(均傳) 후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劉如大)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黃大闢), 김이순(金利淳)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 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수 시간이 지나 일본군이 급히 이르러 유여대 이하 6인을 헌병대에 구류하였다가 그날 밤에 내보냈다.”고 밝혔다.

유여대목사 복심법원 판결문
유여대목사 복심법원 판결문

의주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유여대 목사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한 1919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5월 6일에 유여대 목사는 3・1운동 참여 동기를 묻는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년(1919년) 2월 10일경 선천(宣川) 평북노회(平北老會)가 끝나는 날에 나는 선천으로 갔다. 의주(義州) 방면의 노회는 의산노회(義山老會)라고 부르는데, 전에 평북노회에 속하여 있었는데 작년에 위 노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작년까지의 전도회가 남아 있어서 이번에 분리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의산노회의 회계를 담임하고 있으므로 그 돈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인데,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동인을 만났던바 동인이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독립선언서의 대표자로 되면 어떻겠느냐고 하므로 나는 원래 조선독립의 의사가 있었으므로 거사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였던바, 양전백은 독립선언은 경성(京城)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었는데 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찬성은 하겠으나 경성으로 가는 것은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은 일을 (내가) 담임하겠다고 말하여 두었다.”고 했다.

위의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서 알수 있듯이 유여대 목사는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경성으로 가지 않고 의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하겠다는 대목이다.

그가 실제로 선천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장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날은 2월 13일이었다. 그 후의 행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대답한다.

“선천에서 의주로 돌아왔으나 비밀인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월 17,8일경에 의주면 서부동(西部洞) 과부의 집 숙박업소에서 정명채(鄭明采), 김두칠(金斗七)에 대하여 선천에서 양전백과 함께 약속한 사실을 전하고 위 두 사람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용운동(龍雲洞)교회에 동월 23,4일경부터 27,8일경까지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어 나는 성경을 가르쳤으나 그간에 나는 양전백으로부터 무엇인가의 통지가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2월 27일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주(定州)의 사람인 선천교회의 영수 도형균(都衡均)이 나를 찾아와서 독립선언은 3월 1일에 경성 및 각 지방에서 발표하기로 되었으므로 의주에서도 동일을 기하여 행하라. 그 방법은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보내올 터이니 그것을 낭독하고 발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는데, 2월 2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날 밤 정명채, 김두칠 등과 의주면 양실학교(養實學校)에 모여서 독립선언의 발표에 관하여 협의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20인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에 관하여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내일의 일에 관하여 순서를 상의하고, 내가 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더니, 누구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다른 곳에서 발표한 선언서(2・8독립선언서)가 있다고 하면서 한 장의 선언서를 내놓았으므로, 그 선언서를 등사하여 준비해 놓고, 만일에 경성으로부터 선언서가 오지 않을 시는 그 등사한 것을 배포하기로 결정하고, 정명채, 김두칠에게 그것을 등사하도록 명하고, 또 내일 오후 2시 반경 서교회당의 공지에 집합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안석응(安碩應)에 대하여 내일은 도청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명하고, 그날 밤은 서로 헤어지고, 그다음 날 3월 1일 오후 2시경 안석응에 대하여 어젯밤에 명령한 바와 같이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라고 말하고, 나는 오후 2시 반경에 상의한 장소로 갔었는데, 그때 양실학교 교사에 대하여 생도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교사는 생도를 데리고 그 장소로 왔고, 생도의 부형들도 참가하여 7~8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있던 중, 선천으로부터 약 200매의 선언서를 보내왔으므로 등사판으로 만든 것은 중지하고 그 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고 나는 그것을 낭독하고 일동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던 차에 헌병이 와서 우리들을 체포하였다.”고 판사 앞에서 밝히고 있다.

동아일보 1921.11.7 유여대 홍기조 출옥관련기사
동아일보 1921.11.7 유여대 홍기조 출옥관련기사

유여대 목사는 옥고를 마치고 출옥하자마자 의주 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3・1운동으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5년 2월에 그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1년 20여 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나 1934년 신병(身病)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도 후학들을 위해서 계몽적인 저술 활동에 힘써,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출판하였다. 이 가운데 『면무식』은 1935년 초판이 반년이 못돼 절판되자 1936년 2월 증보판을 새로 찍었다. 수익금은 고아들을 위하여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년 1월 13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교육자이자 목회자, 민족지사로서 평생을 헌신한 유여대 목사는 자택에서 별세하면서 아들 삼형제에게 최후로 남긴 필담은 '생명유도(生命有道)'였다. 그의 유해는 의주군 고성(古城)묘지에 안장되었다.

편집자(주) 이 기사는 '기독교사상 2018년 7월호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이 기고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글과 국가보훈처 공훈전사사료관의 자료, 독립기념관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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